창덕궁 후원은 정조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라 한다.
그중 첫번째로 등장하는 곳이 어수문과 규장각, 주합루,부용정,부용지이다
그규모의 장대함이 과히 조선의 르네상스를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가운데 문으로 임금이 드나드는 문이고
양옆으로 난 조그만 문으로는 신하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신하들은 허리를 굽혀야 들어가는 곳.
그만큼 왕권강화에 고심했던 흔적이 보이는 곳이다.
불로문.
이문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늙지않고 오래도록 살라는 축원을 담았다/
의두합
할아버지 정조를 많이 닮았던 효명세자의 공부방이었다고 한다.
왼쪽 정자 뒷쪽으로 규장각으로 바로 통하는 계단이 있다.
나무로 가려졌지만 계단과 대문이 보일락 말락 보인다.
효명세자는 이곳에서 그야말로 열심히 학문을 닦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애석하게 22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비슷한 시기에 순조도 세상을 뜨자
효명세자의 아들이 겨우 7-8세에 왕위에 오른다. 바로 헌종 임금이다 너무 어린 헌종으로 대비(순조비 순원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이 이루어지고
순조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는 이때부터 더 날개를 달고 60년간 이어진다
그토록 추구했던 정조의 개혁, 왕권강화의 노력이 시간이 갈 수록 더 멀어진 것이다
효명세자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한다는군요.
숙종임금때 지어진 애련정이다
연꽃을 무척 좋아하셨다고 한다.
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커텐모양처럼 가장자리가 레이스 모양으로 되어있는 아름다운 정자다
이곳에서 장희빈과 자주 데이트를 즐겼을까..?
연경당인데 안채와 사랑채로 왕비와 임금님이 거처했던 곳이라 한다.
안채 뒷쪽에는 요즘말로 주방도 있었다.
안채에서 사랑채로 건너가고 있다.
강력한 왕권을 만들고자 했던 정조의 마음이 서려있는 존덕정이다.
존덕정 내부에는 "만천명월주인옹자서"라는 제목으로 글이 있는데 정조가 쓴 글이다.
만천명월주인옹이란 정조 22년에 스스로 지은 자인데 22년 동안 문예부흥 외척과 환관배척 등 개혁정치를 실행한 후 자신의 의지대로
정치질서를 바로잡고 왕권을 확립한 후 자신에 찬 어조로 자호로 삼은 것이다.
내용은 뭇개울들이 달빛을 받아 빛나지만 달은 오직 하나이다
내가 바로 그 달이요,
너희들은 개울이니,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에 합당하다. 는 뜻이다.
글에서 느껴지는 정조의 자신감과 왕권강화를 위해충성을 강조하는 어투가 준엄하다.
그밖에 팔자(양반)걸음을 연습하는 징검다리식 돌도 자연스럽게 놓여있다.
신라의 포석정을 연상케 하는 옥류천이다.
임금과 신하가 모여 한 때나마 풍류를 즐기는 곳.
머리아픈 것들 잠시 내려놓고 시도 짓고 술도 마시며
임금이 직접 농사를 체험하는 곳이다.
왕비는 누에를 쳤다고 한다.
누에치는 곳은 규장각 옆 서향각이라 했다.
화성행궁 때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가마 멀미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자
가마꾼들을 연습시키고 식사 제공을 했던 곳이다.
정조는 살아서 왕위를 물려 주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같이 여생을 보내려고 준비한 곳이
화성 행궁이라고 한다.
가끔 어머니랑 그곳으로 행궁할 때 이곳에서 모든 준비를 했다.
하루 반나절이나 걸려서야 화성행궁에 도착된다고 하니
멀미중 가마멀미가 제일 독하다는데, 어머니 건강이 얼마나 걱정이 되었으면...
여기서 되도록 멀미가 덜나게 가마꾼들을 연습시켰을까..
정조의 효심을 엿볼수 있다.
궁궐담옆으로 작약이 그자태를 뽐내고 있다.
창덕궁후원은 예약하지 않으면 관람이 불가능하다
예약은 거의 한 두 달 전에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