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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의 정원

by 현서* 2023. 6. 29.

고속도로에 그렇게 비를 뿌리더니

지금은 저녁나절,  한가하게  비.. 그쳐준다.

피고 지고,

이름 모를 꽃들, 나무들

바라보니 참 좋다.

 

 

 

 

 

 

10년 전부터 가꾸기 시작한 종갓집 정원은 10년이 지나서야 품위를 갖추기  시작했다.

나의 소망을 저버리고 위선을 부리면 어쩌나 했던 기우는 사라졌다.

내 의도를 배반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다.

중층 나무는 벌써 5층의  육중한 건물을 올렸다. 산수유와 백리향은 구석구석에 향수를 뿌리고

이팝나무는 풍성한 밥상을 차린다.

매화는 낙목한천에서 선비의 기상을 과시한다.

후박나무와 오미자는 어머니의 위장병을 다스리고, 동백나무는 화사한 야외복에 빨간 꽃을 무수히 달고 애절하게 춘희를 부른다

 

 

 

 

 

내가 드문드문 갈 때마다  멀리서부터 쌍수를 들어 환호하는 정원수들이 어머니가 곁에 오면 어느새 시무룩해졌다

저희끼리 곁눈질을 하며 움츠러들었다.

천 리 밖 정원을 곧잘 관리했던 노모가 이제는 진귀한 것들을 훼손하기만 한다.

포악해지는 생애의 끝자락 기억의 회로가 고장 났기 때문이다.

노후는 왜 저렇게 살벌해지는 것일까?

 

 

 

단아한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던 정원은 어머니의 모습과 함께 망가지고 있다.

그 스스로가 나를 배반하지는 않지만, 대책 없는 노후가 나의 기대를 깡그리 무너뜨린다.

 

 

 

 

천릿길을 마다 않고 다리품 팔아 심은 황금회화나무, 공작단풍이 꺾인 것을 볼 때는 예리한 칼로 살점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5년만 더 온전한 모습으로 생활하기를 학수고대했건만 그동안의 불효를 떨쳐버리고 마음먹고 효도하려고 작정했을 때 이미 때는 늦었다.

 

 

 

 

다만 정원이 나의 정성을 헤아려 어머니의 무심한 횡포에 견뎌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허창무 시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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