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슬퍼하는 이들이란 하느님이 누구이신가? 를 드러내시는 뜻이다.
하느님은 우리와 똑같이 우리의 죄 때문에 슬퍼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불행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시고 인간이 지은 죄를 보시고 우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슬퍼해야 한다.
많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아무런 슬픔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다.
셋째, 온유한 이들이란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온유한 그분의 모습이 하느님의 아드님의 모습이며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온유한 마음만이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은총으로 온유한 마음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가 있다. 가장 큰 불행은 완고한 마음이다.
넷째,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만이 거짓과 불의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것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다.
하느님의 것에 대해 주림과 목마른 사람만이 하느님을 찾아 나선다.
예수님이 인간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 때문에 인간을 찾아 나섰듯이
다섯째, 자비로운 이들이란 하느님의 공동체에서 사는 이들의 모습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가 6,36) 고 말씀하신 것 같이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요,
하느님의 공동체이다.
여섯째, 마음이 깨끗한 이들이란 현실의 진리를 밝히신다.
즉, 이 세상 종말에 가면 현재의 것들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해답이다.
마지막 날에 승리하는 자는 마음이 깨끗한 이들이다.
그들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그 도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흉측한 것과 거짓을 일삼은 자도 결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도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다만 어린양의 생명에 책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 묵시 21,27)
일곱 번째,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란 자기 신원에 맞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해야 할 일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평화를 가져다주러 오셨다.
이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 하느님이 주신 평화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가 아닌 사랑의 방법이다.
따라서 사랑으로 평화를 건설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산 위에서 가르쳐주신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요약한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떤 생활이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진복 팔 단은 병들어 있는 우리의 영혼을 치유시켜주는 약이며 거짓과 탐욕과 불의로 병든
우리의 마음을 낫게 해주는 진리이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행복관을 생활하는 만큼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 자신이 될 것이며
잃어버렸던 우리의 참모습을 되찾게 될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행복한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행복을 집접 목적으로 삼지말고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행복을 직접 목적으로 삼지말고 행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고 또 그러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행복의 길은 행복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일이다.
여덟 번째,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엔니오 모리꼬네가 별세했다는군요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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