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에 비친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1938년> 노천명(1911~1957) 시인은 어릴 때 홍역을 앓아 사경을 헤매다 다시 소생했는데 이 때문에 이름을 '천명(天命)'으로 바꾸었다. 하늘로부터 다시 받은 목숨으로 천수(天壽)를 누리라는 뜻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평생 독신으로 살다 1957년 타계했다. 노천명 시인은 고독의 차가운 차일을 친 시인이었다. 실제로도 고독벽이 있었다. 시 '자화상'에서 자신의 풍모를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 하기 어려워한다"라고 썼고,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라고 썼다. 이 시는 한 마리의 사슴을 등장시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다. 시인은 사슴의 몸통과 다리를 배제한 채,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처럼 사슴의 목 윗부분을 그려낸다. 관(뿔)을 쓴 '높은 족속'으로 스스로를 도도하고도 고고하게 표현하지만, 2연에서는 물리칠 수 없는 마음의 통증을 보여준다. 마음의 통증은 어디에서 연유할까. 노천명은 많은 시편에서 어릴 때의 평온했던 시간으로 귀소하려는 욕구를 드러낸다. "절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우에 돋고", "삼밭 울바주엔 호박꽃이 화안한 마을"로 시인의 마음은 자주 이끌린다. 그 시간들은 화해와 무(無)갈등과 동화적인 세계이다. 그런 세계를 동경하는 화자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마음의 결손을 유발한다. 그 괴리의 거리와 슬픔의 크기를 시인은 가냘프고 긴 사슴의 목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남빛 치마와 흰 저고리를 즐겨 입었다는 노천명 시인은 한국시사에서 시적 대상을 시적 화자와 겹쳐 놓음으로써 현대 서정시의 동일성 시학을 선보인 최초의 여성 시인이었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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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사슴의 외면적인 특성(귀족적 품위) ◆ 2연 : 사슴의 내면적인 특성(동경,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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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겉으로는 사슴을 가볍게 스케치한 한 폭의 작은 그림 같지만, 사슴에게 인격을 불어 넣고 감정을 이입(移入)시켜 어느덧 사슴은 시인 자신의 모습으로 변모되어 독자 앞에 나타난다. 불행한 현실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이는 사람에게 하나의 질곡(桎梏)일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거기에 바로 노천명 시인의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 두 연만으로 된 단순한 구도의 이 작품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된다. 목이 긴 것과 슬픈 것과는 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짐승들은 목이 짧다. 그런 가운데서 목이 길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남다른 모습이기에 홀로 외톨이가 되는 이유일 수 있겠고, 목이 길기에 높이 세운 머리가 더욱 오만하고도 고고한 외로움을 지니게도 할 듯하다. 이러한 사슴은 또한 다른 이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혼자 말없이 점잖고 쓸쓸하게 살아간다. 이러한 모습에서 시인은 사슴의 먼 과거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향기롭고 우아한 뿔이 있는 것을 보면 무척 고귀한 족속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사슴은 때때로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잃어 버린 전설을 떠올리며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먼 산을 바라본다. 그 때의 사슴은 더욱 가냘프고도 슬프게만 보인다. 이 시는 '사슴'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시인의 사상이나 감정을 개성적으로 표현한 시로서,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사슴의 귀족적인 품위와 고고한 아름다움에 감정을 이입시켜 '시인 내면의 근원적인 고독과 이상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고 있다. 현실의 세계보다는 어떤 먼 이상의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정신적 고고함속에서 어쩔수 없는 인간적으로 동경하는 세계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 현실과 타협할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현실에 절망하지도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독한 자아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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