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과 지옥
일본 무사 하나가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의 답을 얻을까하여 선사를 찾아갔다.
“ 무슨 일로 오셨소?”
“ 스님, 말씀해주십시오. 천당 지옥이 과연 있습니까?”
“ 흥!” 선사가 농담 반 조롱 반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 어떻게 감히 자네 같은 무식쟁이 건달이 그런 것을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더란 말인가?
되지 못한 질문으로 내 시간을 빼앗지 말게.”
순간 무사는 얼어붙었다. 세상에 그 누구도 일본 사무라이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나? 남의 아까운 시간 축내지 말고 어서 꺼지라구!”
무사는 화가 폭발했다. 번개처럼 칼을 뽑아 선사의 머리를 겨누었다. 그런데,
칼이 선사 머리에 닿으려는 찰라, 한 소리가 들려왔다.
“ 이것이 지옥이요.”
다시 무사는 얼어붙었다.
자기 분노가, 공격받는 상대와 함께 자기에게도 지옥문을 활짝 여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선사는 그것을 분명히 가르쳐주고자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것을 감수하고 있지 않는가?
심호흡을 하면서 무사는 천천히 칼을 거두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깊숙이 머리 숙여
절을 했다.
선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것이 천당이요.”( Roger Walsh의 <영성의 본질>)
최근 연예인들이 연이어 자살로 삶을 마감하여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신자라 하니, 자살로 삶을 끝내면 지옥에 간다는 기독교 교리가 별 작용을 못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유사 이래 내세를 담보로 종교는 면면히 그 끈질긴 생명을 이어왔습니다.
이제 21세기를 살아가는 신인류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 볼 시점이라고 생각 합니다.
삶 다음에 내세를 설정하여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희망을 제공해주고, 보다 더 선한 삶을 유도하고,
나아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한다는 점에서 천당과 지옥의 방편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의식이 고도로 깨인 현대인에게 이 방편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듯 합니다.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충분히 이룰 수 있는 행복도 내세를 위해 포기한다든가,
내세를 위해 이 소중한 현재의 삶을 방기해버리는 역기능이 크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정직하지 못한 성직자가 의도적으로 내세를 이용하여 신도들에게 현실의 삶을 경시하게 할 때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그래서 공자도, 예수도, 석가도 한결같이 내세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거나 지극히 비유적인 방식으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현재 내가 서있는 지점에 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당을 보지 못한 자는 죽어서도 천당을 볼 가능성은 없이 보입니다.
현재의 삶을 포기하고 설령 천당에 간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 현재 여기에서 천국을 찾고 천국을 누리십시오.
이 땅에서 천국을 본 자는 생사와 관계없이 이미 천국을 본 자입니다.